[클릭 이사람](9) 출판번역 외길인생 양원곤

  • [클릭 이사람](9) 출판번역 외길인생 양원곤 경향신문 [2000.4.20]
 

해마다 연말이 되면 우리 나라의 신문과 방송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발표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보도하며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있다. 바로 번역이다. 특히 노벨문학상 부분에 이르러서는 어느 언론도 예외 없이 우리의 번역수준이 아직 미흡하다거나 지원이 부족하다는 등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0여 년 이상 되풀이되어 온 해묵은 논쟁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다. 번역의 중요성은 공허한 구호에서 끝나고 해마다 같은 주장이 되풀이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묵묵히 번역발전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번역계가 그나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지만 나름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양원곤(37). 엔터스코리아 사장. 외국어 교육에 인생을 건 사람이다. 양사장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한국에 건너왔다. 낯설고 물설은 고국땅. 성장하면서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때 경험한 고생이 훗날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주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그는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익혔다. 한국에 건너온 이후에도 일본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 90년대 초반부터 일본어 강사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오랜 적대감을 조금씩 벗고 일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일본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게다가 양 사장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 강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때 6만 명에 달하는 제자를 두기도 했다.

양 사장의 인기비결은 상세하고도 친절한 강의.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결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친절하면서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그의 강의를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와 번역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는 강사 생활 중에 번역의 낙후성을 느꼈고 그런 만큼 번역시장이 가진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1995년 그는 단돈 5백만원의 자본금으로 구 월드시사번역통역(이하 월드시사)을 설립했다. 저렴하지만 품질 좋은 번역을 납품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발로 직접 뛰는 영업전략을 통해 월드시사는 급성장을 계속하였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월드시사는 1997년 갑자기 IMF라는 유탄에 맞았다.

설립 초기 월드시사는 기업체가 필요로 하는 번역물을 주로 수주 받았다. 그러던중 기업들이 갑자기 밀어닥친 IMF라는 직격탄에 흔들리자 월드시사 역시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기업이 문을 닫는 현실에서 월드시사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이때 양사장은 지금까지의 사업방식으로는 직면한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사업다변화를 꾀했다. 첫 번째 눈을 돌린 곳은 출판계였다.

당시 출판계는 국내 최대 도서공급업체인 보문당의 부도로 연쇄도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너도나도 불확실한 신규 출판을 꺼려 시장이 극도로 위축되었다. 양사장은 위기는 기회라는 평범한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기며 출판계의 어려운 사정을 오히려 재도약의 전기로 삼았다. 그는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번역품질을 무기로 출판계를 파고들었다.

그는 저작권 중개업체와 출판사를 연결하여 우수한 외국서적을 국내 출판사에 소개해 주었다. 한편 전문번역프리랜서와 계약을 맺어 우수한 품질의 번역을 제공하였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출판사들이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열심히 뛰다보니 월드시사는 어느새 출판번역물 전문 회사로 성장하였다. 불과 2년 뒤인 1999년에는 출판번역물 기준으로 국내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출판번역은 매우 까다롭다. 출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어떤 번역보다도 치밀하고도 정밀함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럼에도 그가 회사 창립 4년 만에 국내 최고의 출판번역 실적을 올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만큼 번역의 품질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투철한 프로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번역회사를 운영하면서 누구보다도 우리 나라 번역의 문제점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컴퓨터의 능력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번역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우수한 인재양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올해들어 회사의 이름과 형태를 주식회사 엔터스코리아로 전환하였다. 컴퓨터 자판의 엔터 키에서 사명을 착안해 냈다. 엔터스코리아란 컴퓨터와 실천의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이름대로 그는 인터넷상의 번역인재 양성기관인 트랜스쿨(www.transchool.com)과 국내 최초의 번역작가 등용문인 제1회 번역작가 인터넷선발대회를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침체된 국내 번역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번역에 뜻을 둔 전문번역작가 지망생에게 등단 기회를 부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낙후된 번역작가에 대한 처우를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트랜스쿨과 번역작가 인터넷선발대회는 회원모집과 응시원서를 접수한 지 일주일 만에 접속횟수 4천회를 돌파하였다. 트랜스쿨의 목표회원 수는 연말 기준 1만명. (주)엔터스코리아는 금융감독위원회의 등록심사를 마치고 5월중 주식을 공모할 예정이다.

양 사장의 번역에 대한 야망은 끝이 없다. 그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전세계 외국인을 대상으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홈페이지 개설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영리 목적의 사업 차원을 넘어 한국어를 비롯한 한국문화 전파의 첨병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야말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재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려울수록 적극적인 생각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는 지금도 직원들과 함께 하루 14시간씩 일한다. 한번 사업구상에 골몰하면 그 생각이 꿈에도 나타날 정도로 몰입한다.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는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제 사업은 곧 사명감과 직결됩니다. 번역에 대한 사명의식 없이는 사업도 성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하지요. 그러면 성공이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IMF위기마저 재도약의 호기로 엮어낸 양사장. 그의 젊은 도전정신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는 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그의 인생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어보인다.